이글루스


당신은 '언니' 라고 말해본 적이 있는 사람입니까?

 
어느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자들은 언제부터 '언니' 라는 말을 버렸을까.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나보다 나이 많은 사촌들이 자신을 가리키며 '형' 이 아닌 '언니' 라고 부르도록 했던 유년기의 어떤 시간을.

그것은 내가 채 국민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의 기억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약간은 갈색조로 퇴색된 그 때의 장면을.

소설 '임꺽정' 인지 만화 '임꺽정' 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 장면이 있다.

가도치가 죽었을 때, 꺽정이 가도치를 안고 '언니야-' 라면서 울었던 장면.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언니' 라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언젠가 아버지와 식당에 갔을 때, 아버지께서는 분명 식당의 젊은 여 종업원을 향해 손을 들며 말씀하셨다.

'언니야-'

이런 것들을 미루어볼 때 언니란 아마도 '자신과 가까운 손윗사람' 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쩌면 '형' 과 병용하여 쓰였을 가능성이 많은데, '형'은 주로 나이든 여성, 나이든 남성 사이에서 쓰였다고 생각되며 '언니' 는 어린시절 혹은 형제 등의 친밀한 관계에 국한되어 쓰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과연 남자들은 언제부터 '언니' 라는 말을 버리게 되었을까.

나는 그것을 80년대 쯤에 대학을 중심으로 '형' 이라는 칭호가 여학생들 사이에서 퍼지던 것과 비슷한 시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여학생들은 당시 남자 선배들에게도 거리낌 없이 '형' 이라고 불렀다. 이는 '학형' 의 줄임말로서 그저 선배보다 친밀하고, 오빠보다 덜 젠더구분적인, 그래서 자신을 여성이라는 젠더로부터 분리시켜 남성들만의 주류사회에 편입하기 용이하게 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당시는 지금에 비해 훨씬 군사주의적 가치가 팽배하여 상대적으로 여성이 비하된 시기, 여성적 가치가 열등한 것으로 인식되는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들은 '언니' 를 버리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언니' 란 '형' 과 다르게 '여동생' 이 '손윗누이' 를 부를 때 쓰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나이 많은 여성들도 '형님' 을 썼지 '언니' 를 쓰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으니까.

'언니' 는 어느새 여성과 어린이의 말이 되어, 남성들의 언어사회로부터 추방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비록 이것이 정확한 이론은 아닐지라도,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무척이나 알고 싶은 하나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대체 언제부터 '언니' 를 버렸을까.

우리는 대체 왜 '언니' 를 버린 것일까.

by 제절초 | 2007/04/03 21:08 | The Grapes of Wrath | 트랙백 | 덧글(15)

트랙백 주소 : http://fearghoul.egloos.com/tb/1070332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빛의제일 at 2007/04/03 21:27
밸리에서 보고 왔습니다. 제가 알기로는(어디 잡지에서 읽었는데) '언니'라는 호칭은 자신과 性이 같은 손윗형제자매를 부르는 호칭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형+언니라고 할까요.
Commented by 이끼 at 2007/04/03 21:30
가끔쓰는데요 =ㅂ= "언니 정신좀 차리지??" 뭐 이런정도[갈굴때죠 그러니까..;;]
Commented by RESISTANCE at 2007/04/03 21:56
오우, 생각지도 못했던 생각을 접했네요. 좋은 글입니다. 추추천!
Commented by dcraider at 2007/04/03 23:32
흠...우리 아버지때만 해도 언니라는 말이 일반적이었다고 하더군요. 어릴 적 형들한테 언니라고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Commented by 신세타 at 2007/04/03 23:41
사실 남자도 언니란 말을 쓰는게 잘 못된 게 아니라고 들었어요. 그런데 왜인지는 안 나와 있더군요;;; 예전 책에서 봤는데..
Commented by 베지밀비 at 2007/04/04 00:43
저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젠더 분리와 이성애주의(는 오버인가) 의 강화 덕분에 사라졌던 것들이 아닐까요.
옛날 말에는 '그녀'라는 표현이 없었다잖아요.
(그리고 3인칭 표현 자체가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
Commented by 가일 at 2007/04/04 01:41
그동안은 전혀 신경쓰지도 못했던 사실을 환기시킬수 있었어요. ㄳㄳ
Commented by L.N at 2007/04/04 11:40
헤에.....그러고 보니 어릴때는 언니라는 말도 자주 썼던것 같은데 말이죠.

뭐, 요즘에는 미묘한 뉘앙스로 '누뉘임~' 이라고 할때가 많아져셔 고민이지만 말이죠......제어가 안 돼.....
Commented by 파김치 at 2007/04/04 13:04
졸업식 노래에서도 나오잖아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그 때 선생님한테 형은 왜 축하 안해주냐고 물었더니 언니라는 말이 그냥 손윗사람 부르는 말이었었었대요. 저희 땐 이미 언니는 여자애들만 썼었죠.;
Commented by 유루 at 2007/04/04 15:10
고정관념이겠죠. 여자한테 쓰는 말, 남자한테 쓰는 말 구분해서 사용하고, 그렇게 행동하고 ...
저한텐 '언니'라고 부르셔도 되요, 제절초님. 'ㅂ'/ 훗
Commented by 제절초 at 2007/04/05 06:08
빛의제일// 아아, 과연. 제 추론이 맞았군요 'ㅁ'!
이끼// 아하하 그러세요 'ㅂ'?
Resistance// 에헷 고맙습니다^^
dcraider// 그쵸? 저도 그랬어요.
신세타// 그러니까요. 근데 어떤 책이었어요 'ㅅ'?
베지밀비// 와와 웬지 동지>ㅂ<(?) 그녀는 제가 알기로는 일제 강점기에 들어온 것으로 알고 있어요.
가일// 에헷 감사>ㅂ</
L.N// 푸후후 그거 웬지 '옵빠앙~' 하고 비슷한거 아니예요^^?
파김치// 아아, 그것도 그렇지 'ㅅ'
유루// 어머 언니 그래도 돼요 'ㅁ'?(...)
Commented by 파닭 at 2007/04/05 11:09
검지와 새끼만 편 오른 손을 얼굴 오른뺨에 바싹 대고, 새끼손가락을 살짝 구부리며 '언니이~♡'
...죄송합니다OTL 그런데 그럼 여자들은 언제부터 '형'이라는 단어를 안 쓰게 된 걸까요... 파양이 형형 할 때마다 왠지 어색한 저[...]
Commented by 제절초 at 2007/04/05 21:38
파닭// 그건 아마 대학의 '학문하는' 여자들이 남자들 사회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들만의 정체성을 정면으로 드러내고 나선 이후일거라고 생각해 'ㅅ'
Commented by 유루 at 2007/04/05 23:21
ㅡ^- 언니...정겹군화~근데 제절초님 왠지 어려워요. ㅠㅠ (난 단순해서..)
Commented by 제절초 at 2007/04/06 06:06
유루// 에헤헤^^;;; 쓸데 없는 의문입니다^^;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