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6월 11일
And She Said, ~ 한밤중의 방문자
"이건 말야, 내가 아는 남자애가 얼마전에 겪었던 이야기래. 맹렬한 무더위도 한풀 꺾이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여름 밤에 있었던 이야기야.
들려줄까?
비가 내린 끝의 축축한 밤이었어. 그 애는 늦게까지 숙제를 하고 있다가 문득 보게 된거야. 자기가 보고 있는 책머리에 서 있는 새하얀 소녀를. 소녀는 그 애를 보고 있었던가봐. 그 애가 자신을 의식해 바라보는 걸 알고는 가볍게 웃더라나. 그 애는 놀랐대. 놀랐겠지. 공부하다 말고 한뼘 남짓한 크기의 여자애가 자기를 향해 웃는걸 봤으니 얼마나 놀랐겠어? 그치만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잖아. 그 애도 할 수 없이 겸연쩍게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지.
그 새하얀, 아니 하얀 옷을 입어 새하얗게 빛나는 것 처럼 보인 소녀는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는 듯한 얼굴로 웃고 있었지만 묘하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대. 어째서였을까? 그 조용한 가운데 그 애도 아무 말 없이 소녀를 마주 보다가 자신을 그저 바라만 볼 뿐이라는 것을 알고 금방 흥미를 잃었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기만 하는 소녀에게 더 큰 관심을 가지는건 조금 무리였겠지. 거기다 그 애는 과제중이었고 말야.
과제는 새벽이 다 되어서야 마무리 되었고, 책을 덮으며 크게 기지개를 켜던 그 애는 아까의 소녀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 몇시간 동안이나 자신을 저런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던걸까 생각하면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지. 그리고 소녀 역시 그 애가 뭔가의 일을 마무리 지었음을 깨달았는지 아까보다 더 밝은 표정으로 환하게 웃었다지 뭐야. 그건 정말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환한 웃음이어서 그 순간 만큼은 피로를 잊은 기분이 들었대. 과제를 끝낸 뒤에 모처럼 기분이 좋아진 그 애는 무겁게 내리 깔리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올리며 소녀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어. 불이 꺼진 방 안은 칠흑처럼 어둡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 마치 어딘가에 격리된 듯한 가운데 예민해진 후각은 옅지만 싸하게 느껴지는 향기를 맡았다고 해. 진하지는 않지만 어쩐지 머리가 맑아지는 듯한 그런 향기였대. 아마 여름밤이어서 습기찬 공기가 미미한 향기를 더 진하게 느껴지도록 했는지도 모르지. 아무튼 그 애는 그렇게 기분좋게 잠이 들었대. 이런 것도 그 소녀의 덕인가 해서 고마움을 느끼면서 말야.
날이 밝아 눈을 뜨자 소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더래. 그렇지만 서늘한 아침 공기 속에 옅게나마 남아 있는 어제의 그 향기가 어제 있었던 이상한 일들이 사실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었지. 아무튼 그 일은 그 일이고, 그 애는 학교에 가야 했어. 학생이었으니까 말야. 다시 시작된 일상은 여전히 빡빡하고 쉼없이 그 애를 조여왔고, 그러다보니 그런 한여름 밤의 꿈같은 환상은 금새 그 애의 기억에서 지워졌지. 그런데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온 그 애 앞에 그 소녀는 또 다시 모습을 드러낸거야. 이번에는 게임을 하고 있는 와중이었대. 물론 게임이란게 하다 말고 잠시 넋을 놓을 수 있는게 아니잖아? 행여나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세라 그 애의 집중력은 모니터를 향해 다시 돌아갔지.
그렇게 얼마나 게임을 했을까? 문득 아까의 소녀 생각이 나서 고개를 돌려보니 여전히 아까와 같은 얼굴로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를 볼 수 있었대. 그 애는 몇시간이고 질리지 않고 자신을 바라봐 준 소녀에 대해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살짝 손가락 끝으로 소녀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주었고, 소녀는 깜짝 놀랐는지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배시시 웃으며 자기 머리를 양 손으로 만지작 거렸다지. 얼마나 귀여웠을까. 놀라기는 했어도 머리를 쓰다듬어 준 그것 자체는 싫지 않은 모양이었어. 그 날은 그렇게 갔고, 그 애는 어제도 그랬던 것 처럼 소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잠이 들었대.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밤이 깊으면 어김없이 소녀가 나타났어. 일주일 쯤 지났을 때는 나타난 뒤에도 묘하게 기운이 없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어 의아하게 생각했다지만. 아무튼 소녀는 밤 늦게 나타나서는 잠이 들기 직전까지 웃음 가득한 얼굴로 그 애를 바라보았고, 그 애 역시 소녀가 좋았던 건지 그 동안은 밤약속을 한개도 잡지 않고 늘 일찍 집에 들어가곤 했어. 숙제를 하다가도, 책을 보다가도, 아니면 게임을 하다가도 문득 옆을 바라보면 소녀가 있었고 그 애는 소녀에게 마주 웃어주며 피로를 덜곤 했대.
습관이란 무서운거야. 그렇게 매일같이 얼굴을 보는 사이가 되자 어느샌가 그 애도 소녀가 나타나는 것을 당연한 일상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익숙해지고, 길들여진다고 하지. 그 애는 이미 소녀에게 길들여져 매일 밤 귀가하면서 소녀와의 조우를 기쁜 마음으로 기대하게 된거였어.
그렇지만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은 갑작스럽게 사라지는 법일까. 언젠가부터 소녀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대. 하루 이틀은 그러려니 했지만 그것이 며칠씩 계속되자 초조한 마음이 들었지. 그래도 어쩌겠어. 환상인지 실제인지도 모르는 소녀에게 연락을 할 방법은 없었으니까. 그 애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문득 문득 자신의 옆을 바라보며 의기소침해 하는 것 뿐이었지.
시간이란 무정하지. 그렇게 보고 싶던 사람도 며칠이 지나자 조금씩 잊혀져 가기 시작했어. 아니 잊혀진다기 보다는 당장 눈 앞에 닥친 일 때문에 사고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났다고 하는 쪽이 좋을지도 몰라. 바쁘게 과제며 일을 하다 보면 소녀를 생각할 틈 따윈 없었고, 가끔씩 밤늦게 집에 돌아와 멍하게 앉아있다 보면 그제서야 소녀의 웃음이 떠올라 쓸쓸한 얼굴로 소녀가 서 있던 그 자리를 돌아보았던거지.
그러다보니 어느샌가 계절도 바뀌었어. 더운 공기는 물러가고 스산한 바람이 피부를 스치는 계절이 오고 있었지. 그래서 더 이상은 필요 없게 된 선풍기와 돗자리를 창고에 넣기 위해 베란다로 나간 그 애는 창고에 그것들을 넣고 나오는 참에 우연히 어떤 것을 보게 되었어. 어느새 차가워진 공기를 느끼며 몸을 움츠리다가 보게 된 그것은 작은 화분이었지. 이미 화분 안의 흙은 팍팍하게 말라붙어 있었고 그 안에는 흙과 잘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말라 쪼그라든 식물의 잔해가 있었대. 그렇지만 뭐 그런게 그렇게 중요하겠어. 거기다 추운데 말야. 그 애는 금새 흥미를 잃고 따뜻한 방 안으로 서둘러 돌아왔어. 그리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웠지.
잠시 누워서 천정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던 그 애의 머리 속에 문득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무척이나 환해서 보고 있기만 해도 기운이 나는 것 같았던 그 웃음짓는 얼굴이. 그 웃음은 이미 매우 추상적인 형태가 되어있기는 했지만 그 애는 확신할 수 있었대. 자신은 그 소녀를 생각하는거라고 말야. 그리고 그와 함께 아까 보았던 화분의 말라붙은 식물이 떠올랐다지. 어째서였을까, 그 둘이 동시에 떠오른 것은.
문득 그 애는 자신이 무척이나 바보같은 생각을 했다고 했어. 혹시나 내년 여름이 되면 또 다른 소녀와 만날 수 있지는 않을까 하고. 그러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지. 나도, 여름이 오면 화분이라도 하나 방에 놓고 키워볼까...?"
# by 제절초 | 2007/06/11 10:57 | And She Said, | 트랙백 | 덧글(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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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건 겨울에 얼어죽었다 부활한 선인장뿐=ㅅ=;;
저도 선인장이라도 키워보면 볼 수 있을까요?(발그레...)
"반.바.지. 소.년. 절절히 원합니다."
무심한 녀석 같으니.
이끼// ...아마?(웃음)
insane// 아이쿠^^;;
seijurou// ...바...반바지 소년!! 하앍(...).
lajune// ...전 없는데요;;;
레놀도야지// 어이쿠 그래서야^^;;
베지밀비// >ㅅ< 그러게요.
... 근대 잠시후에 머리속에 문뜩 떠오르는건..
[ 토 막 ]
... 이 게임 아시는분 있다면 orz
Lord// ...저기. 그러시면 곤란하지 말입니다? 이래봬도 토막 팬(...).
사실 처음엔 제목 보고 괴담일 것 같아 선뜻 클릭하지 못했어요. 전 겁이 정말 많거든요.
kirkie// ...괴담이라면 괴담이지요 'ㅂ'
캭캭// 고맙다-ㅂ- 후후후후. 소녀가 아니라 중년이었으면 그야말로 괴담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