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5월 03일
And She Said, ~ 풍장(風葬)의 시대
"친구는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콩콩 몇 번 두드렸어. 그리고는 잠시 다른 손으로 이마를 감싸쥐었다가 이내 한숨을 푹 하고 쉬었지.
'야.'
짧은 말이었지만 무엇인가가 부글거리는 듯한 여운이 남는, 그런 느낌이었어. 분노일까, 괴로움일까, 혹은 단순한 짜증일까. 나는 그 감정들이 곧 나에게 이를 세우고 사냥개처럼 덮쳐들거라는 단순하고도 뻔한 예측을 하며 거기에 대비해 자신을 지킬 준비를 하기 시작했어.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가락의 박자는 점차로 빨라지고 친구의 시선은 종잡을 수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 그것은 나에게 지워지는 긴박감을 더했고, 나도 모르게 손이 땀으로 젖어버린 것을 깨달을 수 있었어. 그리고 드디어 친구가 입을 열었지.
'너 있잖아....'
말투가 예상외로 차분하게 가라앉아있었기에 오히려 내가 힘이 빠져버렸어.
'...아니, 내가 네 감정적인 문제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게 좀 우습긴 한데, 그래도 말 안하면 안될 것 같아서 말야. 그치?'
그랬지. 일단 걔한테 고민을 상담한건 나였으니까.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어.
'내가 전에도 가끔 너한테 말했던 적이 있는 것 같아. 화분 이야기 말야. 있잖아, 사람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라면 화분의 꽃을 돌보는 것처럼 하는게 좋다고 생각해. 어떤 책에서 본 것 처럼 말야. 그렇지만 그거랑은 또 별개로 너한테 말해주고 싶은게 있는데... 음...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 지우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을 지워야겠다고 생각하며 특별하게 만들지 마. 아우...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있잖아, 정확히 말하면 너랑 헤어진 그 사람 말인데... 너는 그놈을 개새끼라고 부르고 싶겠지만 아무튼 그 사람을 그냥 학교 선배 외에 다른 아무 위치에도 놓지 말란 얘기야.'
나는 친구의 이야기에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지. 일어나기 시작한 감정의 동요가 조금 당혹스럽게 느껴지고 버거웠기에 감추고만 싶은 기분과 함께.
'그 사람을 개새끼라고 부르면서 욕하는 것조차 네게는 오히려 안좋을지도 몰라. 그건 어떤 식으로든 그 사람에게 다른 사람과는 다른 자리를 부여한다는거고 결국 그에 대해 남들과는 조금 다른 기분을 갖게 된다는거야. 그럼 안돼. 그에게로 향하는 모든 감정적인 연결을 다 끊고 버려버려. 아무리 밉더라도, 아무리 싫어도 말야. 그냥 네 인생에 없었던 일처럼 만들란 말이지.'
난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어. 그렇다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건 아냐. 분명 친구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그렇지만 잠자코 듣고만 있는건 웬지 불합리하게 느껴졌어. 맞는 말인것 같은데 쉽게 승복할 수 없는 그런 기분이 들었지. 그러다 문득 나는 말없이 내 휴대폰을 꺼내어 보기 시작했어. 다이어리들도 꺼냈지. 친구는 그런 내 행동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어.
휴대폰과 다이어리에는 마치 지층처럼 켜켜이 퇴적된 그와 나의 시간이 있었지. 앞으로도 계속 쌓아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치 대격변으로 멸종이 일어난 양 순식간에 모든 것이 뒤바뀌었어. 남은 것은 폐허가 된 마음과 과거의 앙금, 힘겹게 살아남은 내 감정의 파편들 뿐이었지. 나는 한참동안 휴대폰을 뒤적이며 그와 찍었던 사진, 그와 죽받았던 문자메시지, 그가 선물한 노래 같은 것들을 확인했어.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지.
과연 이 시간들을 이 기억들을 끊고 지우고 없앤다는 일이 온당한 것인지 말야. 그러다 문득 친구를 보았어. 친구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 다정하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한 그런 얼굴이었어. 친구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지.
'...힘들지? 그렇지만 그것도 괜찮아. 언젠가 그것들을 봐도 네게 아무런 감흥이 없다면 그 때가 정말로 네가 그에게서 자유로워진 그 때일거야. 그렇게 믿어. 내리기 힘들면 그런 식으로 지워도 돼. 어차피 결국엔 다 익숙해지는거잖아. 돌이 파도에 쓸려서 둥글둥글해지는 것처럼 말야.'
나는 대꾸하지 않았어. 그냥 다시 고개를 숙이고 그와 나누었던 추억과 감정들을 하나 하나 확인했지. 발자국을 따라 길을 거슬러가듯. 화려하게 채색된 과거가 보였어. 빛나는 과가도 있었지. 그러나 묘하게도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그것들은 하나 둘 퇴락하고 있었어. 문득 고개를 돌려보면 지나온 길에는 어떤 색깔도 남아있지 않은 무채색의 기억들만이 자리한 채였지. 나는 그런 식으로 그를 죽여갔던거야. 마치 풍장(風葬)하는 것처럼. 언제까지고 내 지루한 여행을 지켜봐주는 마음 좋은 친구의 응원을 받으며.'
# by | 2008/05/03 08:46 | And She Said,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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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렇게 하면돼 시간이란 마술같은 것 잊을 수 있을거야 ~
캔디맨의 일기가 생각나는 글이네요.
Lord// 그럴리가 없지 않습니까'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