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2월 01일
And She Said, ~ My Father My Hero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영웅의 몰락을. TV만화의 주인공이 쓰러지는 것 보다도 더 비현실 적이면서 더욱 절망적으로 영웅이 무너지는 모습을.
권투선수였던 나의 아빠는 나의 어린 시절을 온통 장식하는 영웅이었다. 바위같은 가슴과 강철같은 어깨를 가진 나의 아빠는 나를 지키는 수호신이었고, 우리 집이라는 왕국의 왕이었으며 어떤 악당도 물리칠 수 있는 거인이었다. 나는 언제까지라도 아빠가 영웅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또한 아빠는 언제나 그래왔다. 그 날 까지는.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며 수많은 선수를 링에 눕혀온 아빠는 그날 챔피언과의 경기를 가졌다. 나의 영웅이 모두의 영웅이 되는 찬란한 순간을 보기 위해 나는 엄마를 졸라 경기장을 찾았다. 나는 소리높여 아빠의 이름을 불렀고, 믿음직한 전사는 나를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두터운 근육이 울퉁불퉁한 아빠의 등이 그 날 처럼 멋지게 보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 성과 같던 아빠는 자신이 쓰러뜨려 온 그들과 마찬가지로 매트에 무릎을 꿇었다. 거인이, 왕이, 영웅이, 수호신이 몰락하는 순간이었다. 차라리 그 광경을 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뻔 했다. 그랬다면 나는 '다음에는 반드시!'라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을 것이고, 아빠는 반창고 투성이로 부어 터진 얼굴에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이며 엄지손가락을 마주 세웠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수호신은 다시 한번 전장으로 나섰을 것이고, 나는 그 뒤에서 손을 흔들며 승리를 기원했을 것이다.
챔피언은 잔혹했다. 몇번이고 일어서는 아빠를 몇번이고 무너뜨렸다. 성벽처럼 크고 튼튼했던 등이 어느새 부실한 울타리 처럼 작아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빠의 등을 보기 싫어 고개를 돌렸을 때, 아빠는 결국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대기실에서 나오는 아빠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더이상 아빠는 무적의 영웅이 아니었다. 그냥 부서지고 엉망으로 망가진 폐허일 뿐이었다. 아빠도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문득 발을 멈췄고, 눈 앞에서 걸어가는 웅장함은 온데간데 없는 초라한 뒷모습만을 보았다.
그 때부터였다. 나는 더 이상 아빠를 사랑하지 않았다. 패배해 몰락한 영웅은 영웅이 아니었다. 아빠는 그저 내가 자립할 때까지 나를 돌보는 의무만을 다해야 할 존재일 뿐이었다. 나는 아빠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고, 시들어가는 낙엽처럼 작아져가는 아빠를 뒤로 한 채 어른이 되었다.
나는 어른이 되었고, 아빠는 노인이 되었다. 힘없는 노인이 어른이 된 나에게 얼마나 귀찮았는지. 나는 그저 아빠를 '살아있게만' 할 뿐이었다. 아빠는 하루 하루 죽어가고 있었다. 시들어 볼품없는 화분을 버리는 것 처럼, 언젠가 아빠가 시들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나는 TV를 켰다. 아침나절의 TV에서는 언제나처럼 시시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시리얼에 우유를 부으며 문득 TV화면에 눈을 돌린 나는 그 안에서 웃고 있는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십수년이 지났지만 기억할 수 있었다. 아니, 잊지 못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의 수호신을 쳐부순 그 남자가 웃고 있었다. 진행자의 시시껄렁한 질문이 있었다.
'지금까지 가졌던 경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으신가요?'
남자는 잠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큰 입에 넓적한 턱. 혐오스러운 이종(異種)의 늙은 전사가 거기에 있었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메스껍고 지저분한 목소리였다.
'아아, 십년도 더 전에 있었던 챔피언 방어전이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상대 선수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요.'
'어떤 경기였길래 그러시나요?'
'뭐라고 해야 할까, 한 마디로 하면 끈질겼지요. 쓰러뜨려도 쓰러뜨려도 있는 힘을 다해 제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공포영화에서 좀비와 싸운다면 그런 기분이 들까요? 저는 도저히 그를 이해할 수 없었죠. 그런데 문득 그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관중석에서 두 손을 꼭 쥔 채 부들거리며 이 쪽을 노려보는 한 소녀를 보았습니다. 그 때 이해했어요. 아 이 사람에게도 딸이 있구나 하고요. 제 딸도 그날 제 경기를 보러 와주었었거든요. 제가 제 딸에게 영웅인 것 처럼, 그도 저 여자아이에게는 영웅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는 더 이상 그것은 권투도 무엇도 아니었어요.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딸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싶은 아버지의 자존심 싸움일 뿐이었지요. 그가 계속해서 일어날 때마다 정말로 그가 죽어서라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까지 생각했어요. 결국 경기는 제가 이겼지만요. 그 날만큼은 정말 이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텐카운트가 떨어지는 순간 고개를 돌리고 있던 소녀가 이쪽을 바라봤었는데, 그 소녀의 얼굴에 맺힌 실망이란 오싹할 정도였어요. 내가 졌다면 내 딸이 저런 얼굴을 했었겠구나 생각하니 이긴 것이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죠. 아마 그 소녀는 아버지의 패배 그 자체를 용서할수가 없었을 겁니다."
마지막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묘하게 편안한 기분이었다. 마지막 남은 시리얼을 한숟갈 입 안에 떠 넣으며 아직도 자고 있을 아빠 생각이 났다.
대충 그릇을 싱크대에 쌓아 놓은 뒤 거름종이에 커피를 떠넣었다. 스위치를 넣자 잠시 후 부글거리며 커피 향이 피어올랐다. 향긋한 커피 향내를 가슴 깊숙히 빨아들이며 생각했다. 아아, 오늘은 아빠에게 모닝커피를 갖다주자고.
.
.
.
.
.
.
꽤 오래된 이야기이다.
한때 홈런왕이었던 마크 맥과이어에게 한 아이의 아버지가 싸인을 요청했다.
"제 아들이 당신의 싸인을 갖고 싶어 합니다. 당신의 제 아들의 영웅이예요."
그러자 맥과이어는 싸인을 해주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당신 아들의 영웅이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아이의 영웅은 아버지여야 해요."
비슷한 이야기를 허영만 님의 만화에서도 본 적이 있다. 아마 비트.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러 마지막 힘을 다해 헤엄쳐가며 아버지는 말했다.
"아이는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있어 영웅이고, 초인입니다."
허세라고 해도 좋다.
난 그런 아버지들이 정말 좋다.
권투선수였던 나의 아빠는 나의 어린 시절을 온통 장식하는 영웅이었다. 바위같은 가슴과 강철같은 어깨를 가진 나의 아빠는 나를 지키는 수호신이었고, 우리 집이라는 왕국의 왕이었으며 어떤 악당도 물리칠 수 있는 거인이었다. 나는 언제까지라도 아빠가 영웅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또한 아빠는 언제나 그래왔다. 그 날 까지는.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며 수많은 선수를 링에 눕혀온 아빠는 그날 챔피언과의 경기를 가졌다. 나의 영웅이 모두의 영웅이 되는 찬란한 순간을 보기 위해 나는 엄마를 졸라 경기장을 찾았다. 나는 소리높여 아빠의 이름을 불렀고, 믿음직한 전사는 나를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두터운 근육이 울퉁불퉁한 아빠의 등이 그 날 처럼 멋지게 보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 성과 같던 아빠는 자신이 쓰러뜨려 온 그들과 마찬가지로 매트에 무릎을 꿇었다. 거인이, 왕이, 영웅이, 수호신이 몰락하는 순간이었다. 차라리 그 광경을 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뻔 했다. 그랬다면 나는 '다음에는 반드시!'라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을 것이고, 아빠는 반창고 투성이로 부어 터진 얼굴에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이며 엄지손가락을 마주 세웠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수호신은 다시 한번 전장으로 나섰을 것이고, 나는 그 뒤에서 손을 흔들며 승리를 기원했을 것이다.
챔피언은 잔혹했다. 몇번이고 일어서는 아빠를 몇번이고 무너뜨렸다. 성벽처럼 크고 튼튼했던 등이 어느새 부실한 울타리 처럼 작아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빠의 등을 보기 싫어 고개를 돌렸을 때, 아빠는 결국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대기실에서 나오는 아빠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더이상 아빠는 무적의 영웅이 아니었다. 그냥 부서지고 엉망으로 망가진 폐허일 뿐이었다. 아빠도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문득 발을 멈췄고, 눈 앞에서 걸어가는 웅장함은 온데간데 없는 초라한 뒷모습만을 보았다.
그 때부터였다. 나는 더 이상 아빠를 사랑하지 않았다. 패배해 몰락한 영웅은 영웅이 아니었다. 아빠는 그저 내가 자립할 때까지 나를 돌보는 의무만을 다해야 할 존재일 뿐이었다. 나는 아빠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고, 시들어가는 낙엽처럼 작아져가는 아빠를 뒤로 한 채 어른이 되었다.
나는 어른이 되었고, 아빠는 노인이 되었다. 힘없는 노인이 어른이 된 나에게 얼마나 귀찮았는지. 나는 그저 아빠를 '살아있게만' 할 뿐이었다. 아빠는 하루 하루 죽어가고 있었다. 시들어 볼품없는 화분을 버리는 것 처럼, 언젠가 아빠가 시들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나는 TV를 켰다. 아침나절의 TV에서는 언제나처럼 시시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시리얼에 우유를 부으며 문득 TV화면에 눈을 돌린 나는 그 안에서 웃고 있는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십수년이 지났지만 기억할 수 있었다. 아니, 잊지 못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의 수호신을 쳐부순 그 남자가 웃고 있었다. 진행자의 시시껄렁한 질문이 있었다.
'지금까지 가졌던 경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으신가요?'
남자는 잠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큰 입에 넓적한 턱. 혐오스러운 이종(異種)의 늙은 전사가 거기에 있었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메스껍고 지저분한 목소리였다.
'아아, 십년도 더 전에 있었던 챔피언 방어전이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상대 선수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요.'
'어떤 경기였길래 그러시나요?'
'뭐라고 해야 할까, 한 마디로 하면 끈질겼지요. 쓰러뜨려도 쓰러뜨려도 있는 힘을 다해 제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공포영화에서 좀비와 싸운다면 그런 기분이 들까요? 저는 도저히 그를 이해할 수 없었죠. 그런데 문득 그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관중석에서 두 손을 꼭 쥔 채 부들거리며 이 쪽을 노려보는 한 소녀를 보았습니다. 그 때 이해했어요. 아 이 사람에게도 딸이 있구나 하고요. 제 딸도 그날 제 경기를 보러 와주었었거든요. 제가 제 딸에게 영웅인 것 처럼, 그도 저 여자아이에게는 영웅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는 더 이상 그것은 권투도 무엇도 아니었어요.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딸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싶은 아버지의 자존심 싸움일 뿐이었지요. 그가 계속해서 일어날 때마다 정말로 그가 죽어서라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까지 생각했어요. 결국 경기는 제가 이겼지만요. 그 날만큼은 정말 이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텐카운트가 떨어지는 순간 고개를 돌리고 있던 소녀가 이쪽을 바라봤었는데, 그 소녀의 얼굴에 맺힌 실망이란 오싹할 정도였어요. 내가 졌다면 내 딸이 저런 얼굴을 했었겠구나 생각하니 이긴 것이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죠. 아마 그 소녀는 아버지의 패배 그 자체를 용서할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는 말을 잠시 멈추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까보다는 그 얼굴이 덜 추악스러워 보였다. 나는 문득 아빠가 있는 2층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얀 천장과 멋없는 형광등이 보였다. 고개를 돌린 내 왼쪽 귀로 여전히 거칠고 메마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만약 그 소녀가 지금 제 이야기를 듣고 있다면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아마 지금쯤 멋진 아가씨로 자라났을텐데. 그날 패배한 아버지에게 실망도 하고 했을테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가씨의 아버지와 싸워 이긴건 나에게도 자랑스러운 일이고, 그 뒤로 그와 같이 강한 남자는 만난 적이 없으니까요. 내 권투 인생에서 감량 다음으로 강하고 무서운 적이었습니다. 그러니 만약 그와 같이 이 방송을 보고 있다면 이제는 그때의 패배를 용서해 주세요. 비록 지긴 했어도, 그는 언제나 당신의 영웅이고자 하는 사람이니까요.'
마지막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묘하게 편안한 기분이었다. 마지막 남은 시리얼을 한숟갈 입 안에 떠 넣으며 아직도 자고 있을 아빠 생각이 났다.
대충 그릇을 싱크대에 쌓아 놓은 뒤 거름종이에 커피를 떠넣었다. 스위치를 넣자 잠시 후 부글거리며 커피 향이 피어올랐다. 향긋한 커피 향내를 가슴 깊숙히 빨아들이며 생각했다. 아아, 오늘은 아빠에게 모닝커피를 갖다주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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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된 이야기이다.
한때 홈런왕이었던 마크 맥과이어에게 한 아이의 아버지가 싸인을 요청했다.
"제 아들이 당신의 싸인을 갖고 싶어 합니다. 당신의 제 아들의 영웅이예요."
그러자 맥과이어는 싸인을 해주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당신 아들의 영웅이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아이의 영웅은 아버지여야 해요."
비슷한 이야기를 허영만 님의 만화에서도 본 적이 있다. 아마 비트.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러 마지막 힘을 다해 헤엄쳐가며 아버지는 말했다.
"아이는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있어 영웅이고, 초인입니다."
허세라고 해도 좋다.
난 그런 아버지들이 정말 좋다.
# by | 2007/02/01 10:10 | And She Said, | 트랙백(1) | 덧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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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알수록 아버지는 존경받지만, 인생을 알수록 그 위치는 낮아지니까. 아들이 아버지가 되면서 그들은 대등해지지만, 지고 있는 것의 무게를 덜어내면 과연 뭐가 남게될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아직 아무것도 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저 두렵기만 하다.
자신의 것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자식들의 삶을 돌봐주길 원하지 않습니다. 생명까지 갉아먹는 부모의 애정과 책임은 받고싶지 않아요.
좋은 이야긴데 너무 싸늘한 소리가 아닌가 싶지만, 너무 뭐랄까... '부모의 위상'을 강조하는거 같아서 좀 삐뚤어진 생각이 나버리네요 -_-;
페// ...그런 아버지도 꽤 많을지도;;?
소화니// 아유우... 으음. 감정이입이 되기 전에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는거겠죠. 그렇게 생각해요.
모노// 그래도 가장의 권위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건... 억지일까요?
바람// 으음.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지. 내게 아버지는 너무 높아.
캭캭// 그러냐^^;;
은조// 아뇨 뭐. 'ㅅ' 이해가 안 가는건 아니예요. 책임질수 있는 만큼만 받고 싶다는 기분이라는 생각입니다.
사실 아버지란 아들들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벽이랄까
산 같은 느낌이지요.
엄지 못할... 세상의 최강자 같은 느낌...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런 것이 하나 둘 사라져 가지만...
그래도 저는 아버지가 좋습니다.
가끔은 아버지가 귀여우세요(응?)
혈견화// 아아, 제게는 일종의 판타지예요. 분명.
영웅 이라는 이미지는 잘 모르겠네요.